10년 넘게 IRP 계좌를 원리금 보장 상품에 묶어두고 연 2% 이자만 받고 있었습니다. 세액공제만 받으면 됐지 싶어서 수익률은 들여다볼 생각도 못 했습니다. 물가는 매년 오르는데 퇴직금이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DB형과 DC형, 48세가 되도록 몰랐습니다
IRP 계좌를 처음 만든 건 연말 정산 시즌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세금 환급받으려면 만들라고 해서 은행 가서 개설했고, 그 뒤로 매년 일정 금액 넣고 방치했습니다. 세액공제(세액공제란 납부할 세금 자체를 직접 줄여주는 제도로, 소득공제와는 다릅니다)를 받고 나면 그걸로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다니는 회사의 퇴직연금이 DB형인지 DC형 인지도 몰랐습니다. 48세가 되도록요. 이 사실을 알게 된 뒤 인사팀에 처음으로 물어봤는데, 우리 회사는 DB형 단독 운영이었습니다.
DB형이란 확정급여형(Defined Benefit)의 약자로, 퇴직할 때 받을 금액이 근속연수에 마지막 월급을 곱한 방식으로 미리 정해져 있는 구조입니다. 회사가 알아서 굴리고 운용 책임도 회사가 집니다. 겉으로는 안전해 보입니다. 그런데 치명적인 함정이 있습니다. 퇴직금 수익률이 사실상 연봉 상승률에 묶여 있다는 점입니다. 연봉이 매년 가파르게 오르는 30~40대에는 유리하지만, 임금 피크제에 접어들거나 연봉 인상률이 연 4% 미만으로 떨어지는 5060 세대에게는 퇴직금이 물가 상승률조차 따라가지 못한 채 실질 가치가 줄어드는 구조가 됩니다.
반면 DC형이란 확정기여형(Defined Contribution)으로, 회사가 매달 퇴직금을 개인 계좌에 넣어주고 가입자가 직접 운용하는 방식입니다. 운용 결과에 따라 퇴직금이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이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DC형으로 전환하라는 조언을 들으면 무조건 좋은 것처럼 들리지만, 퇴직이 10년 안팎으로 남은 시점에서 전환하면 이미 쌓인 퇴직금의 운용 리스크를 본인이 그대로 떠안게 됩니다. DC형 전환이 유리한지는 연령과 투자 경험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는 단서를 빠뜨리면 안 됩니다.
저처럼 DB형 단독 운용 회사라면 개인이 원한다고 DC형으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과반수 이상의 노사 협의를 거쳐 회사 차원에서 DC형 제도를 추가 도입해야만 전환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IRP 추가 납입 부분부터 직접 운용하는 방향으로 돌렸습니다.
안전자산 30% 규정, 채권혼합형 ETF로 뚫는 법
IRP 계좌는 법으로 전체 금액의 30% 이상을 안전자산에 넣도록 강제되어 있습니다. 안전자산이란 예금이나 채권처럼 원금 손실 가능성이 낮은 금융 상품을 말합니다. 은퇴 자금이다 보니 나라에서 보호하겠다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예금 이자가 연 2~3%대인 상황에서 30%를 여기에 묶어두면 전체 포트폴리오 수익률이 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원리금 보장 상품에만 넣어두면 10년이 지나도 계좌가 거의 제자리걸음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채권혼합형 ETF입니다. ETF(상장지수펀드, Exchange Traded Fund)란 주식처럼 거래소에서 사고팔 수 있는 펀드입니다. 이 중 주식 비중이 40% 이하이고 채권 비중이 60% 이상인 혼합형 ETF는 금융당국이 안전자산으로 인정합니다. 즉 예금 대신 이걸로 30%를 채우면, 나머지 70%는 순수 주식형 ETF에 넣을 수 있고 이 경우 전체 주식 비중을 최대 85%까지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IRP 계좌 운용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위험자산 70%: 코덱스(KODEX) 미국 S&P 500 ETF 같은 100% 주식형 상품
- 안전자산 30%: SOL 미국 배당 미국채 혼합 50처럼 채권 60%+주식 40% 구조의 혼합형 ETF
SOL 미국 배당 미국채 혼합 50은 미국 배당성장주 ETF인 SCHD와 미국 국채가 절반씩 섞인 상품으로, 안전자산 요건을 충족하면서 매월 분배금도 지급합니다. 연간 분배율은 약 2.85% 수준입니다. 예금에 넣어두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낫고, 마음 편하게 가져갈 수 있다는 점이 제 경험상 이 상품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미국 주식형 ETF는 달러 자산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원화 강세 구간에서는 환차손이 수익률을 상당히 갉아먹을 수 있습니다. 달러 자산 효과만 강조하면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장기 투자라면 환율 사이클이 희석되는 경향이 있지만, 단기 변동성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달러 코스트 에벌리지, 뉴욕 창구에서 보던 그 브로슈어
적립식 투자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을 겁니다. 그런데 달러 코스트 애버리징(Dollar Cost Averaging, DCA)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면 훨씬 구체적으로 와닿습니다. DCA란 주가 등락에 상관없이 매달 일정 금액을 기계적으로 사 모으는 방식으로, 주가가 높을 때는 적은 수량이, 낮을 때는 많은 수량이 자동으로 매입되면서 평균 매수 단가를 낮추는 효과가 생깁니다.
이 방식은 이미 금융 선진국인 미국에서 수십 년 전부터 검증된 투자법입니다. 실제로 뉴욕의 종합금융사 창구에는 오래전부터 달러 코스트 애버리징 안내 브로슈어가 상시 배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개인 투자자에게 가장 현실적인 장기 투자 전략으로 꾸준히 소개되어 온 방식입니다.
복리(Compound Interest)는 원금에 이자가 붙고, 그 이자에 또 이자가 붙는 구조입니다. 시간이 길수록 효과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집니다. 적립식 투자와 복리가 결합되면 10년, 20년 후에는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큰 자산이 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국민연금공단의 노후 준비 실태 조사에 따르면, 50대 이상 응답자 중 은퇴 후 소득이 충분할 것이라고 답한 비율은 30%에 채 못 미칩니다(출처: 국민연금공단). 이 수치가 말해주는 건 하나입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나중에 선택지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세금 측면에서도 IRP는 일반 증권 계좌와 크게 다릅니다. 일반 계좌에서 미국 주식 ETF로 수익을 내면 매매 차익과 분배금 전액에 배당소득세 15.4%가 과세되고, 연간 금융소득이 2천만 원을 초과하면 금융소득 종합과세 대상이 됩니다. 반면 IRP 계좌 안에서는 운용 기간 중 세금이 이연 되고, 55세 이후 연금으로 수령할 때 연금소득세 3.3~5.5%만 내면 됩니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IRP 세액공제 한도는 연 900만 원이며, 이를 최대 활용하면 최대 148만 5천 원의 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출처: 금융감독원).
IRP를 세금 돌려받는 통장으로만 쓰고 있었다면, 지금이 바꿀 타이밍입니다. 저처럼 10년을 흘려보내고 나서 뒤늦게 들여다보는 것보다, 지금 계좌를 열어보고 원리금 보장 상품 비중을 점검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채권혼합형 ETF로 안전자산 30%를 채우고, 나머지를 미국 주식형 ETF에 적립식으로 쌓아가는 구조만 잡아도 10년 후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금융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본인의 투자 성향과 상황에 맞게 전문가와 상담하시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