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형을 DC형으로 바꾸면 퇴직금이 저절로 늘어날까요? 저는 이 질문에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답합니다. 전환 자체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경우를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임금 피크제 앞두고 DC 전환을 결심하는 분들이 늘고 있는데, 결심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습니다. 전환 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그 계획입니다.

DB형 DC형, 뭐가 다른지 정확히 알아야 전환을 논할 수 있습니다
퇴직연금은 크게 DB형(확정급여형), DC형(확정기여형), IRP(개인형 퇴직연금) 세 가지로 나뉩니다. 여기서 DB형이란 회사가 적립금을 직접 운영하고, 근로자는 사전에 확정된 퇴직급여를 받는 구조입니다. 쉽게 말해 운용 결과가 어떻든 내가 받을 금액이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 DC형이란 회사가 매년 일정 금액을 근로자 계좌에 넣어주고, 그 이후 운용은 근로자 본인이 책임지는 방식입니다. 수익이 나면 더 가져가고, 손실이 나면 덜 받습니다. IRP(개인형 퇴직연금)는 소득이 있는 취업자라면 누구나 개인적으로 가입해 추가로 적립할 수 있는 계좌입니다. 회사에서 DB나 DC를 운영 중이어도 별도로 개설 가능하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제가 2021년에 직접 겪은 일이 있습니다. 오래된 지인이 임금 피크제를 앞두고 "DB 계속 갖고 있어도 되는 거야?"라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때 저는 딱 한 가지만 물었습니다. "적립금이 얼마고, 앞으로 10년 동안 연 4% 이상 굴릴 자신 있어?" 그 친구가 잠깐 침묵했던 게 아직도 기억납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3개월 뒤에 다시 연락이 왔는데, 1억 8천짜리 DC 계좌에 예금 하나만 덩그러니 들어가 있었습니다. "일단 넣어뒀어." 저는 그 말에 조용히 한숨을 쉬었습니다. 연 1.5% 예금에 방치된 겁니다. 임금 인상률이 연 4%대인 회사였으니, DC로 전환해서 오히려 손해 보는 구조를 본인이 스스로 만들어버린 셈이었습니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DC형 가입 근로자 중 원리금 보장 상품에만 적립금을 운용하는 비율이 여전히 절반을 넘습니다(출처: 고용노동부). 전환했지만 사실상 예금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그만큼 많다는 뜻입니다. DC형은 전환 결심이 아니라 운용 계획이 핵심이라는 걸, 저는 그 친구 사례를 통해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10억 목표, 계획 없는 숫자는 희망 사항에 불과합니다
대기업 부장급에서 DB형을 DC형으로 전환하는 사례를 보면, 초기 적립금 2억 3천에 매년 1,300만 원씩 추가 적립하면서 10년 후 10억을 목표로 세우는 구성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포트폴리오 자체는 꽤 체계적으로 짜여 있는 편입니다. 안전 자산 중심으로 먼저 진입하고, RSI(상대강도지수)와 이동평균선 이탈 시 성장 자산 추가 매수 기준까지 세워놓은 방식입니다.
여기서 RSI(상대강도지수)란 주식이 과매수 상태인지 과매도 상태인지를 0~100 범위로 나타내는 기술적 지표입니다. 일반적으로 30 이하면 과매도 구간으로 판단해 매수 시점을 고려합니다. 또한 이동평균선이란 일정 기간의 주가 평균을 이어 만든 선으로, 120일선이나 240일선 아래에 있다는 건 중기·장기 추세 대비 현재 주가가 낮다는 신호로 해석됩니다.
제 경험상 이런 기준을 세워두는 것 자체는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포트폴리오에서 한 가지 치명적인 공백을 발견했습니다. 10년 후 10억이라는 목표의 역산 근거가 없다는 점입니다. 초기 2억 3천에 매년 1,300만 원을 추가하면서 연 수익률 몇 퍼센트를 달성해야 10억이 가능한지, 그 계산이 빠져 있습니다.
간단히 역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초기 원금: 2억 3천만 원
- 연간 추가 적립: 1,300만 원
- 목표: 10년 후 10억 원
- 필요 연복리 수익률: 약 9~10% 수준
연복리 수익률이란 원금과 수익을 합산한 금액에 매년 동일한 비율의 이자가 붙는 방식으로, 장기 투자 성과를 계산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S&P 500의 장기 연평균 수익률이 약 10% 수준이지만(출처: S&P Global), 초기 2억 3천의 상당 부분을 커버드콜 ETF와 국채 중심 안전 자산으로 운용하는 구조에서는 전체 포트폴리오의 가중 평균 수익률이 그 수준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커버드콜(Covered Call)이란 보유 주식에 대해 콜옵션을 매도해 옵션 프리미엄을 수취하는 전략입니다. 배당 수익은 높아지지만 주가 상승 시 수익이 제한된다는 특성이 있어, 성장 자산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인컴 자산으로 분류하는 게 맞습니다.
RSI 30 이하 조건은 S&P 500이 심각하게 급락할 때만 발동하는 기준이라 실제 발동 빈도가 낮습니다. 성장 자산으로의 전환이 언제, 얼마나 빠르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10년 후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목표를 세웠다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연도별 중간 체크포인트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3년 차에는 포트폴리오의 몇 퍼센트가 성장 자산이어야 하는지, 5년 차에는 계좌 잔고가 얼마 수준이어야 하는지, 이런 마일스톤 없이는 10억이라는 숫자가 계획이 아니라 기대가 됩니다.
DC형 운용을 몇 개월간 IRP 계좌로 실전 연습하고 AI 분석까지 활용한 준비 과정은 분명히 칭찬할 만합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포트폴리오 세팅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매년 어떤 속도로 리밸런싱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답이 없으면 계좌 안에서 아무리 꼼꼼하게 배분해 놓아도 결국 방향 없이 표류하게 됩니다.
DC형 전환을 고민 중이라면, 전환 여부보다 전환 후 운용 계획을 먼저 세우시길 권합니다. 연간 몇 퍼센트 수익률이 필요한지 역산하고, 안전 자산과 성장 자산의 비중을 언제 어떻게 조정할지 로드맵을 먼저 그려보십시오. 계획 없는 전환은 저의 지인처럼 1억 8천을 예금 1.5%에 방치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심은 출발점일 뿐, 운용 계획이 실제 퇴직연금의 결과를 결정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금융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실제 DC형 전환 및 운용 결정은 반드시 전문 금융 상담사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