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저는 위기를 두 번 겪고도 지금의 위기를 한동안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1997년 그 겨울의 공포는 몸에 새겨져 있는데, 지금 이 위기는 너무 조용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퇴근길에 10년 넘게 다니던 동네 고깃집 유리문에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손 글씨를 보고도 그냥 걸어왔을 만큼.

잠재성장률이 말해주는 것, 우리는 보고 있는가
1997년 11월, 저는 스물아홉 살 은행원이었습니다. 지점장이 회의실 문을 닫던 그 아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창구 직원 몇 명이 정리된다는 말이 나왔을 때,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아내한테 전화를 못 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그 겨울 내내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위기라는 걸 모두가 알았습니다. 1998년 성장률 -4.9%, 수치가 너무 적나라해서 부정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팀원들 회식 자리에서 "요즘 경기 좀 힘들죠?"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다가 금세 치킨 뜯는 얘기로 넘어갑니다. 저도 별 말을 안 합니다. 마이너스가 아니니 아직 괜찮다는 심리가 깔려 있는 거겠죠. 하지만 이 착각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잠재성장률(Potential Growth Rate)이라는 개념을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잠재성장률이란 한 나라의 경제가 모든 자원을 정상적으로 활용했을 때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성장 속도를 의미합니다. 실제 성장률이 아니라 '엔진 자체의 최대 출력'에 해당합니다. OECD 데이터에 따르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1997년부터 2007년 사이 평균 5%를 웃돌며 47개국 중 7위였습니다. 그런데 2013년 3%대로 내려왔고, 2024년에는 처음으로 1%대까지 무너졌습니다. 2026년 1.66%, 2027년 1.52%로 더 떨어질 전망이고, 순위는 30위권 바깥으로 밀려났습니다(출처: OECD).
스포츠카가 아직 달리고 있는데 엔진이 서서히 망가져 자전거 속도로 굴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2025년 실제 성장률도 1.1%에 그쳤고, 한국은행 스스로도 한때 전망치를 0.8%까지 낮춰 잡았을 만큼 그해 경기 흐름은 약했습니다. 건설업 -5%, 제조업 -1.5%. 이게 단순한 한 해 부진이 아니라 30년에 걸친 구조적 침식의 결과라는 점이 무섭습니다.
지금 우리가 체감하는 것들을 한번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 물가는 올랐는데 지갑은 가벼워졌다
- 점심값 만 원이 넘어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 10년 넘은 단골 가게들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 주변 청년들이 취업을 포기했다기보다 그냥 멈춰 있다
이 하나하나가 통계 속에서 조용히 확인됩니다. 2024년 폐업한 개인·법인 사업자는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창업 후 5년이 지나면 자영업자의 73%가 폐업한다는 수치는, 제가 자주 걷는 골목에서 이미 목격한 현실이기도 합니다(출처: 국세청).
가계부채와 낙수효과, 내 지갑이 왜 얇아지는가
지금 제 월급은 3년 전보다 조금 올랐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오른 월급보다 오른 물가, 오른 이자가 더 크다는 걸 숫자로 체감하게 된 겁니다. 외식 횟수를 세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줄었습니다.
여기서 가계부채(Household Debt)란 가계가 금융기관에서 빌린 모든 빚의 총합을 의미합니다. 국제금융협회(IIF) 기준으로 2025년 1분기 한국의 가계부채는 GDP 대비 90%에 육박합니다. 전세보증금까지 포함하면 GDP 대비 140%를 넘는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IMF 통계로는 2024년 기준 한국의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조사 대상 77개국 중 세 번째로 빠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같은 기간 민간 소비 비중은 오히려 줄었습니다. 빚은 빠르게 늘었는데 소비는 늘지 않은 것입니다.
이 구조가 왜 무서운지 이해하려면 한 신혼부부를 떠올려 보면 됩니다. 금리가 낮던 5년 전에 3억 원을 빌려 아파트를 샀습니다. 지금은 원리금 상환액이 150만 원을 훌쩍 넘었습니다. 월급은 조금 올랐지만 물가도 같이 올라서 실질적으로 쓸 수 있는 돈은 줄었습니다. 이 부부는 위기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자를 못 내거나 집을 팔아야 할 상황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들의 닫힌 지갑이 근처 카페, 식당, 옷 가게의 매출을 조용히 줄이고 있습니다. 이게 지금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상위 계층이나 특정 산업의 소득이 늘면 그 혜택이 점차 아래로 흘러 전체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이론입니다. 반도체 수출이 강하니 경제가 괜찮은 거 아니냐는 질문도 이 논리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반도체 공장 안에서는 돈이 돌아도, 그 옆 골목 식당은 여전히 파리를 날리고 있습니다. 반도체는 자본 집약적이고 고숙련 인력 중심 산업입니다. 많은 사람을 고용하지 않아도 매출이 올라가는 구조입니다. 수출 성적표는 좋아도 내 지갑이 두둑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청년 고용 상황도 겉으로는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쉬었음' 인구란 취업도, 구직 활동도,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냥 쉬고 있다고 응답한 비경제활동 인구를 말합니다. 2026년 1월 이 수치가 46만 9천 명으로 5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가 5월에는 38만 4천 명으로 감소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달 청년 취업자는 코로나 이후 가장 큰 폭인 25만 5천 명이 줄었습니다. 쉬었음이 줄었다고 취업이 늘어난 게 아닌 것입니다. 미취업 기간이 1년 늘 때마다 실질 임금이 6.7~7% 줄어드는 구조이니, 이건 단순히 취업이 늦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평생 소득 전체가 압축되는 문제입니다.
IBK 기업은행 경제연구소는 한국이 현재 고령화로 인한 소비 여력 감소, 과잉 부채로 인한 원리금 상환 부담 증가, 제조업 외 산업 취약성이라는 세 가지 구조적 문제를 일본이 1990년대 초반에 경험했던 것과 거의 같은 형태로 공유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그대로 밟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 경로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수면 위는 조용합니다. 그런데 수면 아래에서는 압력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위기는 모두가 느낄 때 대응이 가능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그래도 저는 괜찮은 것 같은데'라고 느끼신다면 딱 하나만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3년 전보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이 늘었습니까. 저는 솔직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솔직한 대답이 출발점입니다. 물이 끓기 전에 뛰어나올 시간이 아직은 있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금융·투자 조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