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적립금이 500조 원을 돌파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의 75%가 아직도 예금과 원리금 보장 상품에 묶여 있다는 통계를 보는 순간, 3년 전 제가 신입 직원들 DC 계좌를 그냥 내버려뒀던 기억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숫자가 커진 것보다, 그 안의 구조가 얼마나 달라졌는지가 진짜 문제였습니다.

DC 계좌, 67%가 아직 예금이라는 뜨끔한 통계
3년 전 저는 지점 신입 직원들의 퇴직연금 오리엔테이션을 맡았습니다. 투자 성향 설문지를 함께 작성하다 보니 다들 가장 보수적인 항목에 체크를 하길래, 솔직히 그때는 "이 사람들이 원하는 거니까 괜찮겠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봄, 그 신입 중 한 명이 "팀장님, 제 퇴직연금이 3년째 거의 제자리인데 정상인가요?"라고 물어왔을 때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20년 넘게 금융에 몸담으면서 정작 후배들 계좌는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었던 겁니다.
금융감독원이 2025년 기준으로 발표한 퇴직연금 적립금·운용 현황 분석 자료에 따르면, DC형 퇴직연금 가입자의 67%가 여전히 원리금 보장 상품에 자산을 두고 있습니다(출처: 금융감독원). 여기서 DC형, 즉 확정기여형(Defined Contribution)이란 회사가 매년 일정 금액을 납입하고 운용은 근로자 본인이 직접 책임지는 방식입니다. 내 돈을 내가 굴리는 구조인데, 그 67%는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날 점심시간에 후배와 함께 앱을 열어 중립형 TDF로 옮기면서 비용과 주식 비중을 같이 확인했습니다. 크게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었지만, 후배가 "이제 뭘 하고 있는지는 알겠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제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조금 더 선명해졌습니다. 그 이후로 신입 교육 체크리스트에 "퇴직연금 상품 확인" 항목을 한 줄 넣어뒀습니다.
- DC형(확정기여형): 운용 책임이 근로자 본인에게 있어 상품 선택이 수익률을 좌우함
- DB형(확정급여형): 회사가 운용을 맡고 근로자는 정해진 퇴직금을 받는 구조 — DB 계좌의 92%가 원리금 보장 상품에 집중됨
- IRP(개인형 퇴직연금): 퇴직 시 받은 퇴직금을 옮기거나 개인이 자발적으로 납입하는 계좌 — 55%가 원리금 보장 상품으로 방치 중
TDF로 옮긴 날, 처음으로 수익률이 보였습니다
후배 계좌를 같이 열어보던 날, 저도 처음엔 상품 목록이 낯설었습니다. TDF 2045, TDF 2050 같은 숫자들이 나열돼 있었는데, 제가 직접 설명을 해줘야 했습니다. TDF(Target Date Fund)란 은퇴 목표 연도를 숫자로 지정해 놓으면, 그 시점에 맞춰 주식과 채권의 비중을 자동으로 조정해 주는 자산 배분 펀드입니다. 쉽게 말해, 젊을 때는 공격적으로 굴리다가 은퇴가 가까워질수록 안전 자산 비중을 높여주는 구조입니다. 상품을 고르기 어려운 분들에게 현실적으로 괜찮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2025년 금융감독원 통계에 따르면, 퇴직연금 내 TDF 투자 규모는 20조 원을 넘어섰고, ETF(상장지수펀드) 투자 규모는 약 50조 원에 근접했습니다. ETF란 주식시장에서 실시간으로 거래되는 펀드로, 특정 지수나 자산군을 그대로 추종해 낮은 비용으로 분산 투자할 수 있는 상품입니다. 퇴직연금 내 실적 배당형(투자형) 상품 규모가 123조 원이고, 그중 이 두 가지가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출처: 금융감독원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현황).
다만 제 경험상 이 수치를 볼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2025년 실적 배당형 상품의 수익률이 16.8%라고 나오는데, 이건 시장이 유난히 좋았던 한 해의 결과입니다. 해마다 이런 수익률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면 안 됩니다. 또 TDF도 운용사마다 주식 편입 비중과 총 보수 차이가 제법 크기 때문에, "TDF면 다 같다"는 생각으로 고르면 나중에 후회할 수 있습니다. 제가 후배 계좌를 같이 볼 때 가장 먼저 확인한 것도 총 보수 항목이었습니다.
원리금 보장 상품에서 나오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500조 원이라는 숫자는 분명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통계를 처음 들었을 때 든 생각은 "대단하다"보다는 "그 돈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기는 한가"였습니다. 퇴직연금 전체의 10년 누적 수익률 평균이 아직 2.6%대라는 사실을 보면 그 의심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저금리 시절 원리금 보장 상품에 잔뜩 쌓아뒀던 시간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원리금 보장 상품이란, 납입한 원금과 약정된 이자를 보장해 주는 예금·보험 형태의 상품을 말합니다. 손실 위험이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를 들어 수익률이 연 2%인데 물가가 3% 오른다면, 돈의 실질 가치는 오히려 줄어드는 셈입니다. 이게 단순히 수익률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인 이유입니다.
통계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상위 10% 계좌 분석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산의 84%를 실적 배당형 상품에 배분하고 있었고, 수익으로 불어난 비중이 전체 잔액의 67%에 달했습니다. 반면 하위 10% 계좌는 원리금 보장 상품 비중이 74%에 달했고, 잔액의 대부분이 그냥 넣어둔 납입금이었습니다. 이건 누가 더 리스크를 감수했냐의 문제가 아니라, 돈이 스스로 일하게 만들었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건, 디폴트 옵션(Default Option) 관련 수치입니다. 디폴트 옵션이란 근로자가 별도로 상품을 지정하지 않을 때 자동으로 적용되는 사전 지정 운용 방식입니다. 현재 약 53조 원이 이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는데, 그중 85% 이상이 원리금 보장형으로 설정돼 있습니다. 반면 중립형 투자 성향을 선택한 경우 2025년 기준 약 10% 수익률이 나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 선택 하나의 차이가 수년치 수익을 가르는 겁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DC형 퇴직연금을 원리금 보장 상품에 넣어두면 진짜 손해인가요?
A. 원금이 줄지는 않지만, 물가 상승률보다 수익률이 낮으면 실질 구매력이 떨어집니다. 20~30년을 내다보는 퇴직연금의 특성상, 연 1~2%의 수익률 차이가 만기 시점에는 수천만 원 이상의 격차를 만들 수 있습니다. 손실 위험 자체보다 '기회비용'이 더 큰 문제입니다.
Q. TDF가 뭔지 몰라도 가입할 수 있나요?
A. 네, 은퇴 목표 연도만 대략 정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2050년 은퇴를 목표로 한다면 'TDF 2050' 상품을 고르면 됩니다. 그 이후 주식·채권 비중 조정은 펀드가 자동으로 해주기 때문에, 투자 지식이 많지 않아도 꾸준히 유지하는 데 부담이 적습니다.
Q. 퇴직연금 수익률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나요?
A. 금융감독원이 운영하는 통합연금포털에서 전 금융기관의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을 한 화면에 조회할 수 있습니다. '퇴직연금 비교 공시' 메뉴에서 금융기관별 수익률과 수수료를 나란히 비교할 수 있어서, 상품을 선택하거나 이전을 고려할 때 실질적으로 유용합니다.
Q. 증권사에서 퇴직연금을 관리하면 수익률이 더 높게 나오나요?
A. 통계상으로는 증권사 가입자의 평균 수익률이 은행이나 보험사보다 높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는 투자형 상품을 선택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지, 증권사라서 자동으로 수익이 잘 나는 구조는 아닙니다. 증권사에서도 원리금 보장 상품을 선택하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결론
퇴직연금 500조 돌파는 방향이 맞다는 신호입니다. TDF 20조, ETF 50조, 실적 배당형 123조, 이 숫자들은 분명 5년 전과는 다른 풍경입니다. 하지만 제가 후배 계좌를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이 변화가 저 주변에는 전혀 닿아 있지 않았습니다. 통계는 방향을 보여주지만, 내 계좌가 그 방향 안에 있는지는 직접 확인해야 압니다.
당장 대단한 결정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통합연금포털에서 내 퇴직연금이 어느 상품에 들어 있는지 한 번 확인하는 것, 원리금 보장 상품이라면 중립형 TDF나 자산 배분형으로 조금씩 옮기는 것, 그게 시작입니다. 2025년 전체 퇴직연금 수익률 평균이 6.4%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지만 이건 좋은 장세 덕이 컸다는 점도 감안하면서, 장기적으로 흔들리지 않을 구조를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OdR6ICkcthc&list=PLF2nEKwWVaxs2xmvAxfa6O-ucgBuTIKCK&index=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