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증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사수가 일본 기업 리포트를 잔뜩 쌓아두고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NTT 하나의 시총이 미국 GE의 두 배였고, 닛케이는 4만 포인트 근처를 맴돌았습니다. 일본을 따라 배우면 된다는 분위기였는데, 30년이 지난 지금 그 회사들이 어디 갔는지 돌아보면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일본의 교훈: 1989년 시총 1위가 지금 없는 이유
1989년, 세계 시가총액 상위 10개 기업 중 무려 7개가 일본 기업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번 돈으로 뉴욕 록펠러 센터를 사들였고, 미국 일간지는 '재팬 인베이전(Japan Invasion)'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글로벌 시총 상위권에 일본 기업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직접 목격한 일본 기업들의 공통 패턴이 있었습니다. 돈이 넘칠 때 혁신에 쏟아붓는 게 아니라 자산에 쏟아부었습니다. 부동산, 명화, 골프장. 결국 그 자금이 생산적으로 순환되지 않았습니다. 소니는 워크맨으로 전 세계를 호령했지만 지금은 혁신 기업 명단에서 사라진 지 오래고, 도요타는 여전히 훌륭한 제조사이지만 글로벌 빅테크 생태계의 주도권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 맥락에서 지금 삼성전자가 세계 시총 12위까지 올라선 뉴스를 보면 마냥 기쁘기만 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삼성이 이 자리에 오른 건 삼성이 무언가를 특별히 잘해서라기보다, 반도체 가격이 오르고 AI 투자 사이클이 맞아떨어진 덕분이 큽니다. D램 시장 점유율을 보면 삼성이 38.5%, SK하이닉스가 28.8%로 상위 3사가 시장을 사실상 과점하고 있습니다(출처: 트렌드포스). 여기서 D램 시장 과점이란 소수 기업이 전체 공급을 장악하여 후발 주자가 기술 격차를 좁히기 매우 어려운 구조를 의미합니다.
포워드 PER(주가수익비율)은 7.09배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포워드 PER이란 현재 주가를 향후 예상 이익으로 나눈 값으로, 숫자가 낮을수록 미래 이익 대비 주가가 싸다는 의미입니다. 글로벌 반도체 슈퍼사이클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 수치는 여전히 저평가 영역에 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출처: Bloomberg).
지금 삼성에게 긍정적인 신호는 크게 네 가지입니다.
- 레거시 D램 가격이 전분기 대비 63% 추가 상승 전망으로 수익성 회복 중
- HBM3(고대역폭 메모리) 양산 성공으로 차세대 AI 가속기 납품 경쟁력 확보
-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서 TSMC 물량 포화에 따른 반사 수혜
- 앤스로픽 등 AI 기업에 대한 전략적 지분 투자로 차세대 먹거리 선점 시도
HBM이란 High Bandwidth Memory의 약자로,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인 차세대 메모리입니다. AI 모델 학습에 필수적인 엔비디아 GPU에 탑재되는 핵심 부품이기도 합니다.
실행력과 투자전략: 숫자보다 중요한 것
삼성전자가 앤스로픽에 투자했다는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1990년대 일본 기업들이 록펠러 센터를 사던 것과는 방향 자체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싶습니다.
일본 기업들이 몰락한 이유가 단순히 "돈을 엉뚱하게 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의사결정 구조가 느렸고,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조직 문화가 혁신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삼성이 앤스로픽에 조 단위를 투자하는 것은 방향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투자가 실제 조직 내 실행력과 연결되지 않으면 숫자만 바뀌는 형식적 변화에 그칩니다.
제가 증권업에 오래 있으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수조 원짜리 M&A를 한 회사가 3년 후 그 투자를 손상 처리하는 경우를 여러 번 봤다는 겁니다. 투자 결정 자체보다 그 결과를 내부에서 제품과 서비스로 연결하는 실행 속도가 훨씬 중요합니다. 지금 삼성에게 필요한 건 투자 결정보다 그 투자를 소화하는 조직 역량입니다.
한편 오늘 시장처럼 외국인이 대규모 매도를 쏟아낼 때, ETF(상장지수펀드) 구조가 변동성을 증폭시키는 현상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ETF란 특정 지수나 자산을 추종하도록 설계된 펀드로, 주식처럼 실시간 거래가 가능합니다. 국내 ETF 시총이 500조 원을 넘어서면서, 한 종목이나 섹터에 매도 압력이 생기면 ETF를 통해 연쇄적으로 매물이 쏟아지는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삼성전기가 장중 한 시간에 20% 빠지는 현상은 이 ETF 리밸런싱 효과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리밸런싱이란 포트폴리오 내 자산 비중이 목표치를 벗어났을 때 다시 맞추기 위해 매수·매도하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개인 투자자 입장에서 이런 변동성 장세에 대응하는 방법은 사실 단순합니다. 아침 장 시작 직후 의사결정을 피하고, 본인이 세운 시나리오 라인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투자는 빨리 해치우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사수에게 들은 말이 지금도 유효합니다. "시장은 항상 내일도 열린다."
삼성전자의 지금 위치는 시작이지 완성이 아닙니다. 일본의 경험이 보여주듯, 최정상에 올라섰을 때가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 시점입니다. 번 돈을 어디에, 어떻게 쏟아붓느냐가 10년 후 삼성의 자리를 결정할 것입니다. 투자의 방향은 맞아 보입니다. 이제 남은 질문은 실행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투자 결정은 반드시 본인의 판단과 책임 하에 이루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