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코로나 폭락 때 저는 처음으로 "무서워도 사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2008년에는 그 결심을 못 했거든요. 그 차이 하나가 12년짜리 수업료였습니다. 최근 '부의 갈림길'이라는 강의를 들으면서,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에게는 나중에 "그때 살걸"이 될 갈림길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적완화와 긴축의 역사, 테크와 에너지의 충돌, 그리고 AI가 정말 부채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는지. 저도 확신은 없지만, 이 프레임은 한번 진지하게 따져볼 가치가 있습니다.
양적완화가 만든 거대한 갈림길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은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미국은 양적완화(QE)를 택했습니다. 여기서 양적완화란 중앙은행이 장기 국채를 직접 매입해 시중에 돈을 푸는 방식을 말합니다. 돈의 공급이 늘어나면 돈의 가격, 즉 금리가 내려가는 원리입니다. 미국은 이 방법으로 장기 금리를 바닥에 붙여놨습니다.
반면 유럽은 달랐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하이퍼인플레이션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던 독일 분데스방크의 전통을 이어받은 유럽중앙은행(ECB)은 인플레이션 기대 자체를 꺾겠다며 기준금리를 올렸습니다. 여기서 인플레이션 기대란 사람들이 "앞으로 물가가 오를 것"이라 믿는 심리를 뜻하는데, 이 기대가 살아있으면 장기 금리는 절대 내려오지 않습니다. 유럽은 그 기대를 아예 소멸시키겠다는 전략을 썼습니다.
결과는 2010년대 내내 S&P 500과 유로 스톡스 50 지수의 격차로 나타났습니다. 저는 이 사례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좀 멍했습니다. 전략의 차이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이렇게 큰 격차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예상 밖이었습니다. 긴축이 왜 위험한 선택인지, 데이터가 직접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다만 저는 이 프레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돈을 풀면 자산이 오른다"는 논리가 맞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산 거품과 불평등 확대는 다음 위기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양적완화가 옳다는 게 아니라, 긴축의 비용이 훨씬 즉각적이고 가시적이라는 점이 중앙은행의 선택을 구조적으로 제한한다는 게 핵심입니다.
테크 vs 에너지, 지금의 포트폴리오는 충분한가
저는 퇴직연금 계좌를 열었을 때부터 거의 나스닥 100 중심으로 담았습니다. 주변에서도 대부분 비슷했고, 그게 당연한 선택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분쟁이 길어지면서, 이 포트폴리오가 정말 충분한가 하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2010년부터 2023년까지 테크주와 에너지주를 비교해 보면, 초반에는 에너지가 앞서다가 이후에는 테크가 압도합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중국의 과잉 투자 이후 원자재 수요가 꺾였고, 동시에 미국의 셰일 혁명으로 에너지 공급이 급증했습니다. 공급 과잉 상태에서 에너지 기업과 자원 부국은 오랜 기간 침체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 경험은 에너지 공급망의 취약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선박 운임과 보험료는 올랐고, 통행료 논의까지 나오는 상황입니다. 이런 구조적 변화가 에너지 가격의 하한선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국가와 기업을 테크 역량과 에너지 자립도, 두 축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 A그룹: 테크도 되고 에너지도 되는 국가 (미국이 대표적)
- B그룹: 테크는 강하지만 에너지는 취약한 국가 (한국, 일본, 대만, 독일)
- C그룹: 테크는 약하지만 에너지·자원은 풍부한 국가 (브라질, 호주)
- D그룹: 두 축 모두 취약한 국가
저는 이 2 ×2 매트릭스가 꽤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미국을 A그룹으로 단정하기 전에, 셰일 산업의 한계 비용 상승과 탈탄소 압력,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변동성을 조건으로 달아야 한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미국은 A그룹이니까 S&P 500만 사면 된다"는 결론은 너무 단순화된 면이 있습니다. 지금의 미국이 5년 뒤에도 같은 포지션을 유지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AI가 부채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미국의 국가 부채가 39조 달러를 넘어섰다는 뉴스는 이제 새롭지도 않습니다(출처: 미국 재무부 Fiscal Data). 그런데 부채 총액보다 더 중요한 지표는 GDP 대비 부채 비율입니다. 여기서 GDP 대비 부채 비율이란 국가 경제 규모 대비 빚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여주는 숫자로, 부채가 늘어도 경제가 그만큼 성장하면 비율은 안정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이 비율은 코로나 이후 안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장을 끌어올리면 되는데, 문제는 성장이 강해지면 물가가 오르고, 물가가 오르면 금리가 오르고, 금리가 오르면 부채 부담이 커지는 악순환입니다. 이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생산성 혁명입니다. 생산성 혁명이란 같은 비용을 투입해도 더 많은 산출을 내는 구조적 변화를 의미하는데, 이렇게 되면 성장이 강해져도 물가가 오르지 않아 금리를 낮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AI가 바로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1990년대 IT 혁명 당시 연준 의장 그린스펀이 "생산성이 오르고 있으니 금리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라고 판단해 결과적으로 옳았던 사례가 자주 인용됩니다(출처: 미국 연방준비제도). 지금의 AI 혁명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논리가 너무 매끄럽게 처리됐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AI가 생산성을 높이더라도, 그 혜택이 자본에 집중되고 노동 소득으로는 환류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소비가 위축되고 성장 자체가 꺾일 수 있습니다. K자 경제의 하단에 있는 사람들은 생산성이 올라도 실질 임금이 그만큼 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AI가 만병통치약이 될 것이라는 결론에는 이 구조적 모순에 대한 답이 빠져있습니다.
뉴노멀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투자의 시작이다
제가 2020년 오건영 작가 강의를 처음 들었을 때 기억에 남은 말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환율은 10년 뒤에 바뀌어 있을 겁니다." 그때 원달러 환율은 1,100원대였습니다. 지금 1,500원 초반을 보면서 "그나마 많이 내렸네"라고 느끼는 제 자신을 보면, 그 말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실감합니다.
뉴노멀이란 과거에는 비정상이라 여겨졌던 수치가 새로운 기준점이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환율만 그런 게 아닙니다. 코스피도, 금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 때 1년짜리 정기예금 금리가 0.9%였고, 저축은행 특판이 1.1%였습니다. 지금 2%를 보면 너무 낮다고 느끼는 것처럼, 기준점은 계속 이동합니다.
이 닻 내리기 효과, 즉 앵커링(Anchoring)이 투자 판단을 흐립니다. 앵커링이란 처음 접한 숫자에 기준을 고정시켜 이후 판단을 그 숫자에 끌어다 맞추려는 심리 편향입니다. 코스피 2,000이 적정이라는 닻을 내린 사람은 2,500을 보고 과열이라 느낍니다. 코스피 9,000이 가능한지를 논하기 전에, 먼저 내 닻이 어디에 박혀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니케이 8,000을 사거나, 2020년 코로나 폭락 때 코스피 1,460을 산다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는 너무 무서운 선택이었습니다. 그 무서움을 이겨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지금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2008년에는 그 결심을 못 했고, 2020년에는 조금 했습니다. 딱 그 차이가 투자 경험이 12년 쌓인 결과였습니다. 갈림길은 항상 가장 무서운 순간에 나타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지금 S&P 500만 들고 있으면 안 되나요?
A. S&P 500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중동 분쟁 이후 에너지 공급망의 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에너지 섹터를 일부 포함한 분산도 검토해볼 만하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저 역시 나스닥 중심 포트폴리오를 유지하면서도, 에너지주 비중을 소폭 늘리는 것을 고민 중입니다. 정답은 없고, 본인의 투자 기간과 리스크 허용 범위에 따라 달라집니다.
Q. AI가 진짜 부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요?
A. 장기적으로 생산성을 높여 성장을 강화하면서 물가를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만 단기적으로는 데이터센터 건설, 반도체 수요 증가 등 오히려 인플레이션 요인이 됩니다. AI 혜택이 자본에만 집중되고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소비 위축이라는 반작용도 생각해야 합니다. 확신보다는 조건부 기대로 보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Q. 한국 주식은 B그룹이면 투자하면 안 되나요?
A. B그룹이라고 투자 가치가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테크는 강하지만 에너지가 취약하다는 구조적 특성을 이해하고 투자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에너지 비용 상승이 수입 물가를 자극하는 환경에서 한국 기업들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B그룹 내에서도 에너지 효율이 높거나 에너지 전환에 앞선 기업들은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Q. 환율 1,500원이 뉴노멀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A. 2010~2021년 11년간 원달러 환율 평균이 1,160원이었기 때문에, 우리 심리에는 그 숫자가 '정상'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국 금리 상승, 무역 구조 변화, 이스라엘-이란 전쟁등 지 구조적 요인이 바뀌면서 환율의 기준점 자체가 이동하고 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결론
제가 이 강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질문은 이겁니다. "10년 후에 지금을 돌아볼 때, 어떤 갈림길이 있었다고 기억하게 될까?"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갈림길은 항상 지나고 나서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너무 무섭거나 너무 당연해 보여서 눈에 안 들어옵니다.
양적완화와 긴축의 역사, 테크와 에너지의 경쟁, AI와 생산성 혁명, 그리고 뉴노멀로 이동하는 기준점. 이 네 가지 프레임은 완벽한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저는 나스닥 중심 포트폴리오를 유지하면서도, 에너지 비중과 달러 자산 비중을 다시 점검해 볼 생각입니다. "그때 살걸"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제대로 된 질문을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